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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와 방구석] 2020年 10月 13日 :: 이십 일세기 팔자

 

 

 

기술의 변화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쫓아가려고 아등바등했으나 요즘은 기술이라는 녀석의 뒤꽁무니조차 보이지 않는다. 비슷비슷한 하루를 보내다 보면 지금이 21세기라는 건 완벽히 잊는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체감하는 건 찰나다. 이따금, 불쑥, 뒤늦게 실감한다. 책에서만 보던 미래사회의 조각을 손에 쥐면 신기해서 놀랍다가 혼란스럽다. 다시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금방 잊어버린다.

 

추석 연휴에 영화 <호빗> 시리즈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다 봤다. 이틀 만에 기나긴 대장정을 마치고 나니 내가 전쟁을 치른 기분이었다. 총 여섯 편의 영화를 아홉 글자로 요약하자면,

 

‘싸우고 달리고 싸우고.’

 

전투가 벌어지고 등장인물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동안 나는 의미 없는 참견만 했다. 칼과 화살로 싸우다 보니 온종일 전쟁하던데, 총과 폭탄이 무기라면 금방 끝났겠지. 호빗을 구하기 위해 김리, 레골라스, 아라곤이 3일 동안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달리기만 하던데, 그러다 사람 하나 죽지 않나. 면허는 없지만, 셋을 자동차로 태워주고 싶었다. 총으로 빠르게 적을 사살하고,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싸우고, 대기권을 벗어나 우주에서까지 전쟁하는 영화에 익숙해진 탓에 모든 장면이 느리게만 보였다.

 

연휴가 끝나자 허리가 쑤셨다. 이틀에 걸쳐 노트북만 보고 앉아있었으니 그럴 만했다. TV로 봤다면 허리가 훨씬 편했을 텐데. 요즘 같은 시대라면 노트북과 TV가 충분히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대 기술에 대한 믿음으로 그 방법을 검색해봤다. 기술은 언제나 나의 기대를 뛰어넘으니까. 역시 가능했다. 다이소에서 HDMI 케이블을 구매해 큰 화면과 작은 화면을 연결하자 TV 화면에 네이버 메인이 나타났다. 넷플릭스와 유튜브, 그리고 사이버 강의까지 모두 TV로 볼 수 있었다. 영화 속에 현대 기술이 없는 걸 딱하게 여길 게 아니라 기술이 있는데도 모르고 있는 걸 안타까워해야 했다.

 

얼마 뒤에는 이케아(IKEA)의 일본 모델 사진을 보게 되었다. 분홍색 단발머리에 이국적인 얼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이 모델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진만 봐서는 진짜 사람 같은데, 컴퓨터로 만든 가상 인물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마(IMMA).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29만 명이다. 이제는 모델도 사람이 아니라니. 방에 앉아있는 나라는 사람의 존재가치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최근에 HDMI 케이블과 CG 기술보다 훨씬 과학적인 것을 체험하고 왔다. 친구가 다녀왔다는 곳에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찾아갔다. 왠지 내 과학은 좋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일말의 눈길도 주지 않았던 곳을 내 발로 찾아간 것이다. 이곳에서 괜히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신경 쓰일까 봐 일부러 가지 않았다. 선생님에게 휘둘릴까 봐 무섭기도 했다. 난 그만큼 쉬웠다. 정신적으로 건강할 때 가고 싶었다.

 

태블릿 PC에 내 생일을 입력하는 이곳은 역시 최첨단이었다. 선생님이 한자를 적는 동안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평범하기도 쉽지 않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았지만, 여전히 특별하고 싶은 욕심이 남아있었다. 공부할 팔자라고 입을 뗀 선생님은 이어서 사주가 평탄해서 말하는 사람도 재미없고 듣는 사람도 재미없다고 말씀하셨다. 안도했으나 실망했다. 어리석은 나는 마음속으로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전반적으로 좋은 이야기를 들었으나 사람은 마음에 안 드는 게 더 신경 쓰이는 법이다. 다행히 내 정신상태는 건강하다 못해 뻔뻔스러웠다. 계단을 내려가며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해석을 내 방식대로 수정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받아들였다. 내 팔자가 어떻든 어차피 내 마음대로 할 생각이었다. 계단을 다 내려오고 ‘고집이 세다’는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